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2)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실존 인물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며, 아드리앙 브로디의 연기는 이 영화를 경험하는 가장 중심적인 축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 스필만이 살아남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방식에서 다른 많은 영화들과 구분된다. 영웅적 저항도, 극적인 구출도 없이 그냥 살아남는 것. 그 살아남음이 어떤 모습인가를 이 영화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정직하게 담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아드리앙 브로디 분)이 살아남는 방식은 영웅적이지 않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싸우지도 않는다. 그는 숨고, 달아나며, 도움을 받고, 때로는 운에 의지한다. 이 살아남음의 방식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생존 서사의 문법, 즉 주인공이 무언가를 극복하고 성취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는 없다. 대신 그냥 하루를 더 살아내는 것이 있다. 폴란스키의 연출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스필만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지만, 그 재능이 그를 구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남는 것은 그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운이 있었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어쩌면 단순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이 의지가 어디서 오는가를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있다는 것은 스필만의 몸을 통해 전달된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스필만이 바르샤바의 폐허 안에서 혼자 있는 장면들이다. 모든 것이 파괴된 도시에서,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는 혼자 숨어있다. 먹을 것을 찾고, 따뜻함을 찾으며, 들키지 않으려 한다. 이 장면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위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아드리앙 브로디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이다. 그는 이 역할을 위해 몸무게를 30파운드 가까이 감량했고, 피아노를 직접 연습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가 특별한 이유는 그 준비보다 그가 스필만이라는 인물을 몸으로 경험하는 방식에 있다. 두려움, 굶주림, 고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도 살겠다는 의지가 그의 몸 전체를 통해 전달된다. 이 전달이 말이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연기를 이 영화에서 대체 불가능하게 만든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은 살아남음이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가 살아남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왜 죽었는가. 이 질문들이 이 영화 안에서 제기되지 않는다. 스필만이 살아남은 것이 그가 더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죽은 것이 그들이 덜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살아남음은 그냥 일어난 것이다. 그 우연성이 이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음악이 인간에게 하는 것들
피아니스트에서 음악이 등장하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적 층위 중 하나다. 스필만은 피아니스트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며, 그가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서 피아노를 빼앗는다. 게토에서, 폐허에서, 은신처에서 그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 이 부재가 이 영화에서 음악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방식이다. 음악이 없을 때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스필만이 폐건물의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를 내지 않고 손가락으로 건반을 움직이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 중 하나다. 소리를 내면 들킬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움직임 자체가 그에게 필요한 것이다.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그를 인간으로 유지시키는 무언가와 연결된다는 것이 이 장면에서 가장 조용하게 전달된다. 음악이 인간에게 하는 것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호센펠트 대위(토마스 크레치만 분)와의 만남에서다. 독일 장교인 호센펠트가 스필만에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 스필만이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하는 그 순간이 이 영화에서 음악이 인간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가를 가장 완성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점령군과 생존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있는 이 두 사람을 음악이 연결한다. 그 연결이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더라도. 폴란스키 자신이 폴란드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 영화에서 음악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음악을 구원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다. 음악이 스필만을 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음악이 그를 인간으로 유지시켰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암시된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단순히 신체적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 신체적 생존과 함께 인간으로 남는 것의 방법이 스필만에게는 음악이었다. 음악이 인간에게 하는 것들의 마지막 표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든다. 전쟁이 끝난 후 스필만이 다시 무대에 서는 것. 쇼팽의 발라드를 연주하는 것.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인 결론이다. 살아남았고, 음악으로 돌아왔다. 그 돌아옴이 승리인가, 아니면 단순한 지속인가. 이 영화는 그 구분을 하지 않는다. 돌아온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완성이다.
호센펠트라는 존재가 말하는 것
피아니스트에서 빌름 호센펠트 대위는 이 영화의 가장 복잡하고 가장 중요한 보조 인물이다. 그는 독일 국방군 장교이며, 바르샤바에서 나치 점령군의 일원으로 있다. 그러나 그는 스필만을 숨겨주고, 음식을 가져다주며,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행동이 이 영화에서 인간성이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호센펠트가 스필만을 처음 발견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 중 하나다. 폐건물에서 혼자 숨어있던 스필만이 독일 장교와 마주친다. 이 순간 스필만의 두려움과 호센펠트의 반응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호센펠트는 스필만을 신고하거나 죽이지 않는다. 대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묻는다. 스필만이 피아니스트라고 답할 때, 그 답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만드는 첫 번째 연결이 된다. 토마스 크레치만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호센펠트를 단순한 선한 독일인의 클리셰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복잡하다. 그가 스필만을 돕는 것이 순수한 도덕적 선택인가, 아니면 전쟁의 끝을 감지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한 계산인가. 이 영화는 그 동기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이 항상 하나의 동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호센펠트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호센펠트라는 존재가 말하는 것의 역사적 층위도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 실제 빌름 호센펠트는 전쟁 이후 소련에 포로로 잡혀 1952년에 사망했다. 스필만이 그를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이 영화의 마지막에 자막으로 제시된다. 호센펠트가 스필만을 구했지만, 스필만은 호센펠트를 구하지 못했다. 이 비대칭이 이 영화에서 선의가 항상 보상받지 않는다는 것의 가장 조용한 표현이다. 호센펠트라는 존재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은 인간성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예외적인 것인가이기도 하다. 호센펠트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처럼 행동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 희소성이 이 영화에서 인간성의 가능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 가능성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말한다. 한 사람의 선택이 다른 사람의 삶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드문 것인가.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이지만 그것을 서사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음악이 인간에게 하는 것들, 그리고 호센펠트라는 존재가 말하는 것이 로만 폴란스키의 절제된 연출과 아드리앙 브로디의 압도적인 연기로 완성된다.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구분되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작은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루를 더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루가 쌓여서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