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는 DC 코믹스의 악당 캐릭터를 원작으로 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호아킨 피닉스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고담시의 밑바닥 광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는가를 추적하는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려지는 과정을 통해 시스템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악당의 기원을 그리면서 우리가 그 악당에게 공감하게 되는 순간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

웃음이 무너지는 자리
조커의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웃음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는 광대로 일하며,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처음부터 어딘가 어긋나 있다. 그는 신경학적 질환으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웃음 발작을 앓고 있다. 슬프거나 두렵거나 불안할 때, 그의 몸은 웃음으로 반응한다. 이 질환이 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상징이다. 웃음이 감정의 표현이 아닌, 통제 불능의 반응이 된다는 것. 아서의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의 다른 형태다. 사회는 아서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버스 안에서 발작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직장에서 동료들은 그를 조롱하고, 광대 일을 하다 맞은 뒤에도 회사는 그의 편을 들지 않는다. 복지 담당 상담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예산 삭감을 통보하고, 정신과 상담과 약 처방이 중단된다. 아서를 둘러싼 모든 시스템이 그를 외면한다. 이 외면이 축적되면서, 아서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무너져간다. 호아킨 피닉스의 신체 연기는 이 무너짐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하는 요소다. 그는 이 역할을 위해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했고, 그 결과 아서의 몸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다. 이 몸이 춤을 추고, 발작을 일으키고, 웃고 울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관객은 아서의 고통이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실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이 신체성이 이 영화를 단순한 심리 묘사를 넘어선 경험으로 만든다. 아서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다. 지하철에서 자신을 폭행한 세 명의 남자를 죽인 뒤, 아서는 화장실에서 자신이 방금 한 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다. 이 장면에서 그의 움직임은 처음으로 자유롭다. 억눌려 있던 것이 분출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는 순간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폭력의 폭발을 보여준다면, 조커는 그 폭발 직전의 과정을 훨씬 길고 세밀하게 추적한다. 웃음이 무너지는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 자리에 분노가 아니라 해방감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이 영화를 불편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관객은 아서의 해방감에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 공감이 윤리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영화는 그 질문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웃음이 무너진 자리의 공백을, 관객 각자가 채워야 한다.
도시가 만든 괴물
조커의 고담시는 1970년대 말 뉴욕을 모델로 한 공간이다. 쓰레기가 쌓인 거리, 지하철의 낙서, 범죄와 빈곤이 일상화된 도시. 이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고담은 아서를 만든 환경이며, 동시에 아서 같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도시다. 영화는 아서 개인의 병리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병리가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라났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고담의 권력 구조는 웨인 기업으로 상징된다. 토마스 웨인(브렛 컬런 분)은 자선가이자 시장 후보로, 스스로를 고담의 구원자로 포지셔닝한다. 그러나 그의 자선은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아닌 위로부터의 시혜다. 아서가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혼외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갔을 때, 웨인의 반응은 경멸적이다. 그는 아서의 고통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자신과 관련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거부한다. 이 장면이 아서의 내면에서 무엇을 무너뜨리는지를 영화는 섬세하게 포착한다. 도시가 만드는 괴물은 아서 혼자가 아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고담 시민들의 분노가 축적되는 과정이 보인다. 조커를 상징적 영웅으로 삼기 시작하는 시위대의 존재는, 아서의 개인적 분노가 어떻게 사회적 분노와 연결되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조커의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온다. 이것은 아서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아서가 상징하는 것, 즉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표식으로 그 가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동의 얼굴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여기서 나온다. 조커가 표상하는 분노가 이해 가능한 것이라면, 그 분노가 폭력으로 분출되는 것도 이해 가능한가. 영화는 이 질문에 예스라고도, 노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폭력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판단을 관객에게 넘긴다. 이 열린 구조가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을 넘어선 사회적 텍스트로 만든다. 로렌스 셔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고담의 이 불안한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포착한다. 좁은 골목, 어두운 계단, 형광등이 깜박이는 지하철. 이 공간들은 아서의 심리 상태와 정확하게 공명한다. 도시는 아서를 닮아가고, 아서는 도시를 닮아간다. 외부 환경과 내면 상태의 이 상호 침투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한 연출적 선택이다. 고담이 아서를 만들었지만, 이제 아서가 고담을 바꾸려 한다.
광기와 혁명 사이의 경계
조커가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지점은 영화가 아서의 폭력에 어느 정도 공감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사회 부적응자의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미화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 영화가 그런 폭력의 사회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시스템의 문제를 더 날카롭게 비판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 자체가 이 영화의 성취이기도 하다. 답이 쉬운 영화는 이런 논쟁을 만들지 않는다. 광기와 혁명의 경계는 이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유지된다. 아서의 행동은 어디까지가 개인의 병리이고, 어디서부터가 사회에 대한 저항인가. 그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을 영화는 알고 있다. 아서는 의식적인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그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참을 수 없음이 혁명의 불씨가 되는 역사적 현실을 이 영화는 인식하고 있다.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순간은 아서가 TV 쇼에 출연하는 장면이다.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 분)의 토크쇼에서 아서는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이 영화 전체의 해석이 달라진다. 그것은 정신질환자의 예측 불가능한 폭력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이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인가. 영화는 두 해석 모두를 허용한다. 아서가 조커로 완전히 변모하는 순간, 그의 심리 상태에 대한 영화의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된다. 영화 내내 암시되는 것은, 아서가 경험하는 일부 사건들이 그의 상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웃 여성과의 관계, 그리고 일부 장면들의 현실성이 의심스럽게 처리된다. 이 불확실성은 관객이 아서의 서사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만들며, 동시에 그가 경험하는 현실의 왜곡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호아킨 피닉스가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다. 억눌린 것들이 모두 분출된 뒤, 그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세계를 내려다보며 움직인다. 그 춤이 아름다운지, 끔찍한지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둘 다이며, 그 불분명함이 이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다. 광기와 혁명은 같은 뿌리에서 자랄 수 있다. 그리고 그 뿌리를 만든 것은 아서 혼자가 아니라, 아서를 그 자리까지 밀어넣은 세계 전체다.
조커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옷을 입은 사회 비판 드라마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이 영화를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토드 필립스의 연출은 장르의 관습을 해체하면서 관객이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든다. 아서 플렉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순간 우리가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 공감이 우리 사회의 어떤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커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끝까지 우리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