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2019)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 토마신 맥켄지, 스칼렛 요한슨, 그리고 타이카 와이티티가 직접 히틀러 역을 맡아 출연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을 배경으로, 히틀러를 상상 속 친구로 두고 있는 열 살 나치 소년 조조가 어머니가 숨겨둔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풍자와 따뜻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는 아이의 눈으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해체되는가를 담는다. 증오는 가르쳐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배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열 살이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
조조 래빗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열 살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 분)는 훌륭한 나치가 되고 싶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세계의 가장 명확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친구들은 그것을 내면화하며, 어른들은 그 체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조조에게 나치즘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냥 세계의 작동 방식이다. 이 설정이 이 영화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에게 침투하는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열 살이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른이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탐구다. 조조는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알지만 그 언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유대인이 나쁘다는 것을 배웠지만, 왜 그런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무반성이 어린아이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것이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불편한 통찰이다.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출에서 가장 영리한 선택은 전쟁의 공포를 조조의 시선 높이에서 담는 것이다. 어른들이 경험하는 전쟁의 실상이 조조의 눈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파편적이고, 그가 이해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이해가 쌓이면서 조조는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이 흔들림의 과정이 이 영화에서 성장 서사의 핵심을 이룬다.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의 연기가 이 영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는 조조의 열정, 순진함, 그리고 점차 그 순진함이 현실과 충돌하는 과정을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담는다.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모든 층위를 전달하는 이 연기가 어른 배우들 사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그의 존재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열 살이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완성되는 것은 조조가 자신이 배운 것과 자신이 경험한 것 사이의 간격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엘사를 만나기 전까지 유대인은 그에게 추상적인 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인간을 마주했을 때, 그 추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인간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가를 이 영화는 열 살 아이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상상 속 히틀러가 하는 일
조조 래빗에서 가장 독창적인 설정이 조조의 상상 속 친구로 등장하는 히틀러다. 타이카 와이티티가 직접 이 역할을 맡아 우스꽝스럽고 유치하며 때로는 다정한 히틀러를 연기한다. 이 캐스팅과 이 캐릭터의 설계가 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이고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역사상 가장 큰 악의 상징을 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정당한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이 히틀러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통해 답한다. 상상 속 히틀러는 조조의 이데올로기적 자아의 투영이다. 조조가 나치즘을 믿고 싶을 때 히틀러가 나타나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나 조조의 믿음이 흔들릴 때 히틀러도 흔들린다. 이 상상의 친구가 조조의 내면 상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이 이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서사적 기능이다. 히틀러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를 무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데올로기가 한 아이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와이티티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는 히틀러를 코미디 캐릭터로 만들지만, 그 코미디가 실제 역사적 공포를 지우지 않도록 한다. 웃기지만 그 웃음이 불편한 것은, 이 히틀러가 조조의 순진한 믿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런 것을 믿도록 만든 세계에 대한 비판이 이 캐릭터의 우스꽝스러움 뒤에 있다. 히틀러를 희화화하는 것이 역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사람의 비극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선택이다. 상상 속 히틀러가 조조에게 충고를 건네고, 격려하며, 함께 웃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역설적인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이 우습지만 동시에 슬픈 이유는, 그것이 한 아이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히틀러를 친구로 필요로 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가 자라온 세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웃음과 함께 담아낸다. 상상 속 히틀러가 사라지는 과정이 이 영화에서 조조의 성장을 가장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처음에 히틀러는 조조 곁에 항상 있다. 그러나 조조가 현실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히틀러는 점점 덜 나타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조가 히틀러에게 말 그대로 발길질을 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이다.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 그 단순한 행위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완성이다.
증오를 배우지 않은 아이
조조 래빗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하는 어머니 로지가 이 영화의 감정적 중심이다. 그녀는 나치 독일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저항군과 연결되어 있고, 유대인 소녀를 집에 숨기며, 아들이 증오를 배우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영화에서 로지의 역할이 단순한 어머니의 역할이 아니라, 전쟁 중에도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조조와 로지의 관계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층위를 만든다. 그들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 로지가 아버지인 척 아들의 신발을 묶어주는 장면. 이 일상의 순간들이 전쟁의 배경 위에서 더 빛난다. 요한슨의 연기는 이 따뜻함을 연출하면서도 그 따뜻함 아래에 있는 두려움과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웃을 때 그 웃음이 완전히 가볍지 않다는 것이 이 연기를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 아이에게 세상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의 이중성이 요한슨의 눈빛 안에 있다. 로지가 죽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와이티티는 이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조조가 어머니의 신발을 발견하고, 위를 올려다보는 것. 이 절제가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만든다. 그리고 이 죽음 이후 조조가 혼자 어머니의 구두끈을 묶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다. 아버지인 척 신발을 묶어준 어머니의 기억이 그 행위 안에 있다. 이 장면이 대사 없이 이 영화의 가장 깊은 감정적 층위를 완성한다. 증오를 배우지 않은 아이가 이 영화에서 완성되는 것은 엘사(토마신 맥켄지 분)와의 관계를 통해서다. 처음에 조조는 유대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려 엘사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대화가 쌓이면서 그가 배운 것들이 틀렸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엘사는 교과서가 말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인간이다. 이 인식이 조조의 세계관을 바꾸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맥켄지의 연기는 엘사의 생존 본능과 취약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싹트는 연대감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 영화가 마지막에 두 아이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완성된 결론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며, 두 아이가 거리에서 춤을 춘다. 이 단순함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는다. 증오는 가르쳐지는 것이고, 그 가르침이 없다면 아이들은 그냥 춤을 춘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이 마지막 장면은 말없이 완성한다.
조조 래빗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이지만 그 웃음이 가볍지 않다. 열 살이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 상상 속 히틀러가 하는 일, 그리고 증오를 배우지 않은 아이의 이야기가 타이카 와이티티의 독창적인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로 완성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증오는 배워지는 것이고, 배운 것은 잊을 수 있으며, 잊고 나면 사람들은 서로 춤을 춘다. 그 단순한 믿음을 이 복잡하고 따뜻하고 때로 잔인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