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는 실존 인물 조던 벨포트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에너지 넘치는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90년대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사기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인 벨포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세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단 한 순간도 숨을 고르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욕망의 질주를 따라간다. 이 영화는 비판인가 찬양인가. 그 질문 자체가 이 영화가 가장 영리하게 설계한 함정이다.

욕망이 극대화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처음부터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보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한다. 돈, 더 많은 돈, 그리고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 이 직접성이 이 영화의 가장 도발적인 선택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이 매우 크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 노골성이 불편하면서도 시선을 잡아끈다. 욕망이 극대화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이 영화는 세 시간에 걸쳐 보여준다. 처음에는 성공이 온다. 벨포트는 재능 있는 세일즈맨이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팔 수 있다. 그 능력이 그를 부자로 만든다. 그러나 욕망은 충족될수록 더 큰 충족을 요구한다. 더 큰 집, 더 큰 배, 더 많은 마약, 더 극단적인 경험. 이 상승이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이 영화는 끝까지 따라간다. 스코세이지의 연출은 이 욕망의 질주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에서 독보적이다. 편집의 리듬이 벨포트의 내면 상태와 공명한다. 에너지가 넘칠 때 화면은 빠르게 움직이고, 마약에 취했을 때 화면은 왜곡되며, 성공의 절정에서 카메라는 벨포트를 영웅처럼 담는다. 이 시각적 언어가 관객을 벨포트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가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지를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영화에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낸다. 벨포트가 직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들, 마약에 취해 집 앞에서 차를 몰고 귀가하는 장면, 심문받는 장면에서 FBI 수사관을 매수하려 하는 순간. 이 모든 장면에서 디카프리오는 벨포트의 에너지, 매력, 그리고 그 매력 뒤에 있는 공허함을 동시에 담는다. 욕망이 극대화된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를 이 영화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다. 욕망이 극대화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의 가장 솔직한 답이 이 영화에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도구가 된다. 직원들은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고, 고객들은 착취의 대상이며, 가족은 욕망이 충족되는 배경이 된다. 벨포트가 두 번째 아내 나오미(마고 로비 분)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과정이 이 영화에서 욕망의 극대화가 인간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욕망은 결국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마저 삼킨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만드는 공범 관계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논쟁적인 것은 이 영화가 벨포트를 어떻게 다루는가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벨포트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에너지에 흥분한다. 이것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빈번한 비판이다. 이 영화가 욕망과 탐욕을 비판하는 대신 찬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비판이 놓치는 것이 있다. 스코세이지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이 공범 관계로 끌어들인다. 벨포트가 카메라를 직접 보고 말하는 방식이 이 공범 관계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그는 관객에게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 공유의 행위가 관객을 그의 시점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벨포트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세계가 화려하고 재미있게 표현될 때, 우리가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코세이지는 이 반응이 일어나도록 설계했다. 이 공범 관계의 함정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벨포트가 세일즈 강연을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청중을 보여줄 때, 그 청중이 벨포트에게 열광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관객석을 향할 때, 그것이 영화관의 관객에게도 향한다는 것이 암시된다. 우리도 그 청중이다. 세 시간 동안 벨포트의 이야기를 즐기면서 그에게 매혹된 우리도, 그를 향해 열광하는 청중과 다르지 않다는 것. 이 마지막 장면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이다. 마이클 맥도나 역을 맡은 매튜 맥커너히의 짧지만 강렬한 등장은 이 공범 관계의 씨앗을 심는 장면이다. 그는 신입 증권사 직원인 벨포트에게 가르친다. 고객의 돈은 허상이며, 진짜 목표는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라고. 이 가르침이 벨포트가 이후 모든 것을 구성하는 철학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관객은 이 철학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한지를 볼 수 있다. 이해하는 것이 동의하는 것과 같지 않지만,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 세계의 논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스코세이지가 비판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형식적 선택이다. 피해자들이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의도적이다. 벨포트의 세계에서 피해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고객들은 숫자이고, 그들의 손실은 벨포트의 이익이다. 그 불가시성을 영화가 재현함으로써, 우리가 그 세계를 그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판이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 스스로가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
시스템이 허락하는 탐욕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벨포트가 이렇게 오래, 이렇게 크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왜인가. 그의 개인적 재능 때문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인가. 이 영화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답은 이 영화 전체에 걸쳐 산재해 있다. 스트래턴 오크몬트라는 벨포트의 증권사가 운영되는 방식은 이 시스템의 취약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이 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이 영화 안에서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이 적발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규제 기관은 늦게 움직이고, 법의 허점은 넓으며,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이 시스템의 구조가 벨포트 같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FBI 수사관 덴험(카일 챈들러 분)이 벨포트를 추적하는 서사는 이 영화에서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담는 부분이다. 덴험은 올바른 일을 하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느리고 어려운 과정인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고 벨포트가 결국 처벌받는 방식, 즉 타협과 감형을 통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결과를 받는 것이 이 영화에서 시스템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준다. 시스템이 허락하는 탐욕은 이 영화에서 월스트리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벨포트의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은 1990년대 미국 금융 시스템의 특정한 조건 때문이지만, 그 조건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보편적이다. 규제가 느슨한 곳에서, 법의 빈틈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있는 곳에서 벨포트 같은 인물들이 나타난다. 이 영화가 2013년에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벨포트가 출소 이후 실제로 강연자로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맥락이다. 시스템은 그를 처벌했지만, 그 처벌이 그의 이야기를 상품으로 만드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 즉 극단적인 탐욕과 추락과 부분적인 귀환의 서사가 상품이 된다. 시스템은 탐욕을 허락하고, 그 탐욕이 실패해도 그 실패의 이야기까지 상품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말하는 시스템의 가장 냉소적인 진실이다.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불편한 영화다. 세 시간 동안 탐욕의 질주를 따라가면서 그것에 흥분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흥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비판을 설교로 전달하는 대신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에너지는 이 영화의 엔진이며, 그 에너지가 만드는 매력이 이 영화의 가장 위험한 요소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자신이 무엇에 흥분했는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그것이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