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현재, 여성 서사와 미디어 권력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면서 영화 아이, 토냐(I, Tonya)는 다시 한 번 중요한 분기점에 놓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스포츠 실화가 아니라, 한 여성의 재능이 어떻게 계급·폭력·미디어 프레임 속에서 왜곡되고 소비되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 영화입니다. 지금 다시 보는 아이, 토냐는 ‘누가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토냐 하딩 실화와 사회적 시선: 재능은 왜 미움이 되었는가
아이, 토냐는 실존 인물 토냐 하딩의 삶을 다룬 영화지만, 단순한 전기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토냐 하딩은 1990년대 미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에서 분명한 기록을 남긴 선수입니다. 미국 여성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인물이며, 기술적으로는 동시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챔피언’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대신 ‘문제적 인물’, ‘사건의 당사자’, ‘추락한 선수’로 소비되었습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매우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토냐의 재능은 존중받지 못했는가? 왜 그녀의 실수와 주변의 범죄는 그녀 개인의 본질처럼 낙인찍혔는가? 아이, 토냐는 그 이유를 토냐 개인의 성격이나 선택이 아니라, 계급적 배경과 사회적 시선에서 찾습니다.
토냐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폭력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녀의 말투, 옷차림, 태도는 상류층 중심의 피겨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영화는 심판들이 토냐의 기술이 아닌 ‘이미지’를 평가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스케이팅은 훌륭하지만, 품위가 없다”는 말은 스포츠 평가가 아니라 계급적 배제의 언어입니다.
2026년의 관점에서 이 장면들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회, ‘어울림’과 ‘브랜딩’이 성과를 좌우하는 구조 속에서 누군가는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토냐 하딩은 그 구조 속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배제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영화는 또한 토냐가 겪은 가정폭력과 남편의 학대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폭력이 그녀를 ‘비극적 희생자’로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토냐는 폭력 속에서도 스케이트를 탔고, 경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아이, 토냐는 연민을 강요하는 영화가 아니라, 분노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입니다.
실제 사건 이후, 언론은 토냐를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인터뷰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은 사건의 맥락보다는 자극적인 이미지를 소비했습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블랙코미디적 톤으로 재현하며, 미디어가 어떻게 한 개인을 단일한 캐릭터로 납작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줍니다.
2026년 지금, 우리는 소셜미디어와 짧은 영상, 헤드라인 중심의 소비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은 몇 초짜리 클립으로 요약되고, 맥락은 삭제됩니다. 이런 시대에 아이, 토냐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경고처럼 읽힙니다.
토냐 하딩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한 여성의 실패담이 아니라, 사회가 재능을 어떻게 사랑하고, 동시에 어떻게 잔인하게 버리는지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토냐를 변호하지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소비했는가?”라고.
마고 로비의 연기와 여성 캐릭터의 재정의: 사랑받지 못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아이, 토냐에서 마고 로비의 연기는 단순히 ‘잘한 연기’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이 작품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관객에게 쉽게 사랑받을 수 없는 인물이며, 연민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마고 로비의 연기는 2010년대 이후 여성 캐릭터 연기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능합니다.
토냐 하딩은 전통적인 영화 속 여성 주인공의 조건을 거의 충족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우아하지 않고, 말투는 거칠며,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이고, 불쌍하면서도 불편한 인물입니다. 많은 영화들이 이런 인물을 ‘교정’하거나 ‘정화’하려 들지만, 아이, 토냐는 그러지 않습니다.
마고 로비는 토냐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토냐를 있는 그대로 연기합니다.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선택,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태도, 때로는 무책임해 보이는 행동들까지도 감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냅니다. 관객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 감정의 출처를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마고 로비가 이 영화에서 ‘호감도 관리’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사실입니다. 토냐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함과 거친 에너지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 결과 관객은 토냐를 좋아하지 않을 자유를 가지게 되지만, 동시에 함부로 미워할 수도 없게 됩니다.
2026년의 관점에서 이 연기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여성 캐릭터는 오랫동안 ‘설명 가능한 피해자’이거나 ‘극복 가능한 서사’를 요구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토냐는 끝내 극복하지 않습니다. 성공하지도, 완전히 추락하지도 않은 채 애매한 위치에 머뭅니다. 마고 로비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연기합니다.
중요한 점은 마고 로비가 이 작품의 제작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상업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이 이야기를 직접 선택했고, 여성의 이야기가 호감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작품으로 증명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토냐는 여러 차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이 직접 화법은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마고 로비의 눈빛은 관객을 편안한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결국 이 연기는 훌륭함을 넘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바꾼 연기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토냐를 구원하지 않고, 대신 존엄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존엄은, 끝내 사랑받지 못했을지라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디어 조작과 진실의 다층 서사: 누가 이야기를 소유하는가
아이, 토냐가 단순한 실화 영화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지점은 바로 ‘진실을 하나로 제시하지 않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에게 명확한 사실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서로 충돌하는 증언, 모순된 인터뷰,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서사 구조 자체가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됩니다.
영화 속 토냐 하딩, 제프 길루리, 그리고 어머니 라보나는 모두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의 입장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사건을 부정하고, 누군가는 축소하며, 누군가는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이, 토냐는 이 중 누구의 말도 ‘정답’으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정하려는 태도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이 구조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흐립니다. 실제 인터뷰 형식을 차용했지만, 동시에 영화적 과장과 블랙코미디를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로 인해 관객은 끊임없이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웃다가 불편해지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이 감정의 흔들림은 의도적이며, 미디어 소비자로서의 관객을 시험하는 장치입니다.
토냐 하딩 사건 당시, 대중은 이미 하나의 서사를 소비했습니다. ‘질투에 눈먼 문제아 선수’, ‘스캔들로 추락한 챔피언’. 그 서사는 빠르고 자극적이었으며,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그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는가? 왜 복잡한 맥락보다 단순한 악역이 필요했는가?
2026년의 시점에서 이 질문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선별한 뉴스, 편집된 클립, 자극적인 제목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사실보다 감정이 먼저 전달되고, 맥락보다 분노가 확산됩니다. 아이, 토냐는 이런 환경이 이미 1990년대부터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단지 플랫폼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언론은 토냐의 기술이나 기록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의 외모, 말투, 사생활을 소비합니다. 인터뷰는 진실을 묻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이미지를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습니다. 토냐가 어떤 말을 하든,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아이, 토냐는 결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영화가 아닙니다. 대신 진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곡되고, 유통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바로 권력을 가지지 못한 개인, 특히 계급적·성별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성입니다.
결론: 아이, 토냐는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아이, 토냐는 재능에 대한 이야기이자, 폭력에 대한 기록이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누가 소유하는가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토냐 하딩을 영웅으로 복권하지도, 완전히 희생자로 고정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녀를 끝까지 불편한 위치에 남겨둡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정직해집니다.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만, 동시에 더 빠르게 판단합니다. 누군가의 인생은 몇 개의 이미지와 자막으로 요약되고, 맥락은 사라집니다. 아이, 토냐는 그런 시대를 향해 말합니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불편함을 견디는 태도 자체가 책임이다”라고.
마고 로비가 남긴 토냐 하딩의 얼굴은 여전히 질문합니다. “너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관객으로만 남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다시 아이, 토냐를 본다는 것은, 한 인물의 재평가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되돌아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