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아이리시맨(2019)은 찰스 브랜트의 논픽션 원작을 바탕으로 한 3시간 30분짜리 대작이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출연하며,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스트리밍과 극장의 경계를 허물었다. 트럭 운전사 출신의 프랭크 쉬런이 마피아와 얽히고, 지미 호파의 측근이 되며, 결국 가장 친한 친구를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이 영화는 갱스터 장르의 거장이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돌아보며 던지는 가장 긴 질문이다. 범죄와 충성과 배신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소진시키는가를, 이 영화는 느리고 무겁게 추적한다.

기억이 재구성하는 범죄
아이리시맨은 노인이 된 프랭크 쉬런(로버트 드 니로 분)이 요양원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액자 구조는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다. 기억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늙고 쇠약해진 한 인간이 휠체어에 앉아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돌이켜볼 때, 그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리고 그 기억이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그의 삶의 진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스코세이지는 이 불확실한 기억의 층위 위에 영화 전체를 세운다. 프랭크의 삶은 전형적인 갱스터 서사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출신, 우연한 기회, 점진적인 범죄 세계로의 편입,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서의 추락. 그러나 아이리시맨이 기존의 갱스터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 공식을 찬양하는 대신 그것이 한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를 묻는다는 것이다. 굿펠라스의 헨리 힐은 과거를 그리워했다. 아이리시맨의 프랭크는 그 과거를 기억하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정직하게 답한다. 기억이 재구성된다는 것은 그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랭크는 자신이 한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는 살인을 일로 기억한다. 감정이 없고, 망설임이 없으며, 후회도 처음에는 없다. 이 감정의 부재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불안한 요소다. 프랭크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며, 가족을 부양하려 한다. 그러나 그 성실함과 충성심이 범죄의 도구가 되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 자연스러움이 이 영화를 단순한 범죄 드라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만든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배우들의 디에이징은 이 기억의 구조와 연결된다. 드 니로, 파치노, 페시는 모두 실제로 70대이지만, 영화 속에서 40대, 5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했다. 얼굴은 젊어졌지만 몸의 움직임은 여전히 노인의 것이다. 그러나 스코세이지는 이 불완전함을 오히려 기억의 본질로 활용한다. 기억 속의 자신은 젊고 강하지만, 그 기억을 하고 있는 몸은 늙어있다. 그 불일치가 이 영화의 시간적 감각을 만든다. 프랭크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평범하게 처리된다. 극적인 음악도, 슬로우 모션도 없다. 그냥 일어나고, 끝난다. 이 평범함이 오히려 더 깊은 불편함을 만든다. 범죄가 일상이 된 삶에서, 살인도 일상이 된다. 기억이 그것을 재구성할 때, 그 일상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프랭크는 특별히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수행이 그의 삶 전체를 만들었다.
충성의 대가
아이리시맨의 가장 중심적인 관계는 프랭크와 지미 호파(알 파치노 분) 사이의 것이다. 지미 호파는 실존 인물로, 미국 트럭 운전사 조합의 전설적인 지도자이자 마피아와 연결된 복잡한 인물이다. 프랭크는 호파의 경호원이자 측근이 되면서, 두 사람은 단순한 고용 관계를 넘어선 깊은 유대를 형성한다. 이 유대가 영화의 감정적 핵심이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요소다. 알 파치노가 연기하는 호파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활기찬 인물이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원칙적이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지나치게 자기확신에 차 있고, 타인의 경고를 무시하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과도한 자신감이 결국 그를 파국으로 이끈다. 파치노는 이 인물의 카리스마와 맹목성을 동시에 표현하며, 호파를 단순한 희생자가 아닌 자신의 비극에 일부 책임이 있는 인물로 만든다. 충성이라는 가치는 이 영화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프랭크는 호파에게 충성하지만, 동시에 마피아 보스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 분)에게도 충성한다. 두 충성이 충돌할 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이 질문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도덕적 긴장이다. 프랭크에게 충성은 삶의 원칙이자 존재 방식이었다. 그러나 두 충성이 양립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충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어떤 충성을 선택하든, 나머지 하나는 배신이 된다. 러셀 버팔리노를 연기하는 조 페시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이다. 그는 크게 위협하지 않는다.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조용함 안에 거대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프랭크도 알고 관객도 안다. 페시의 연기는 화면에 나오는 모든 순간 그 무게감을 유지하며, 러셀이 프랭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없이 전달한다. 충성의 대가는 프랭크의 가족 관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딸 페기(안나 파킨 분)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어린 페기가 아버지가 행한 폭력 이후 그를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 침묵 중 하나다. 그 시선이 그녀의 성인 시절 내내 이어지며, 결국 아버지와의 완전한 단절로 이어진다. 프랭크가 마피아와 호파에게 충성한 대가는, 자신의 딸을 영원히 잃는 것이었다. 이 상실이 영화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은 슬픔이다.
노년이 마주하는 공허
아이리시맨의 마지막 파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독보적인 부분이다. 호파가 사라진 이후의 이야기, 즉 프랭크의 노년이 길고 느리게 펼쳐진다. 그는 살아남았다. 동료들은 하나씩 죽거나 감옥에 갔지만, 프랭크는 살아있다. 그리고 그 살아있음이 오히려 형벌처럼 느껴지는 노년을 이 영화는 회피 없이 담는다. 프랭크의 노년은 고독하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들은 그를 멀리한다. 옛 동료들은 모두 사라졌으며, 그가 섬겼던 세계도 이미 변해버렸다. 그는 요양원에서 혼자 앉아 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사제가 그를 방문하고, 고해성사를 권유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이 무엇에 대해 후회해야 하는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 불확실함이 그의 공허의 본질이다. 스코세이지는 이 노년의 공허를 감상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프랭크가 눈물을 흘리거나, 극적인 고백을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장면은 없다. 그는 그저 앉아 있고, 기억하고, 그 기억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한다. 이 찾지 못함이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순간이다. 평생을 범죄와 충성과 배신으로 살아온 사람이 노년에 발견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공허다. 그리고 그 공허는 채워지지 않는다. 프랭크가 호파의 딸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 중 하나다. 그는 호파의 딸에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방문 자체가 무언가를 말한다. 그것이 속죄의 시도인지, 아니면 연결의 마지막 시도인지, 영화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프랭크 자신도 왜 그 문을 두드렸는지 완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이유를 아는 존재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프랭크는 자신의 방 문을 살짝 열어두라고 요청한다. 완전히 닫지 말아달라고. 이 단순한 요청이 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인가, 아니면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두려운 노인의 요청인가. 스코세이지는 이 열린 문을 마지막 이미지로 선택하면서, 관객에게 그 의미를 열어둔다. 아이리시맨은 닫히지 않는 문처럼,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자, 갱스터 장르에 대한 가장 성숙한 성찰이다.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은 이 영화가 요구하는 시간이다. 충성과 배신, 범죄와 공허, 그리고 노년의 고독을 충분히 담기 위해 필요한 길이다. 드 니로, 파치노, 페시가 함께 만들어낸 이 마지막 갱스터 서사는, 우리가 오랫동안 매혹되어온 그 세계가 결국 무엇을 남기는지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문은 살짝 열려 있다. 그러나 들어올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