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디 코베트 감독의 2024년 작품 브루탈리스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전후 미국으로 이주해 자신의 건축적 비전을 실현하려는 고군분투를 담은 서사시적 드라마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감독상,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고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작품은, 3시간 21분의 러닝타임 안에 이민, 예술, 권력, 그리고 미국의 약속과 배신을 방대하게 펼쳐낸다. 비스타비전 카메라와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2026년 현재 현대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야심찬 형식적 성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라즐로의 도착과 파국 — 미국이라는 약속
라즐로 토스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아내 에르제베트(펠리시티 존스)와 조카 조피아와 생이별한 채 미국으로 건너온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배가 뉴욕항으로 진입할 때 자유의 여신상이 뒤집힌 시점으로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아메리칸 드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단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것은 환영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경고의 이미지다. 이 첫 장면이 이후 모든 것을 예고한다. 라즐로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리 반 버랜(가이 피어스)을 만난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건축 재능을 알아보고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이 만남이 영화의 중심 갈등을 만들어낸다.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기회는 조건부다. 그것은 라즐로의 예술적 비전을 해리슨의 권력과 욕망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리슨의 의뢰는 점점 라즐로의 예술이 아닌 해리슨 자신의 유산을 위한 것이 되어간다. 라즐로가 자신의 건축 철학을 타협하지 않으려 할 때마다, 해리슨과의 긴장은 고조된다. 그 긴장이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영화의 1막은 라즐로가 낯선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마약에 의존하며 트라우마를 견디고, 에르제베트를 그리워하며, 동시에 자신의 건축 언어를 이 새로운 땅에서 실현하려 한다. 코베트 감독은 이 시기의 미국을 단순히 기회의 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민자를 환영하면서도 착취하는,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통제하려는 복잡한 공간이다. 라즐로가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하는 사람은 사촌 아틸라이지만, 그 환영조차도 따뜻함보다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미국은 이미 라즐로가 상상했던 곳이 아니다. 라즐로가 미국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의 씨앗이다.
영화의 2막에서 에르제베트가 미국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에르제베트는 라즐로보다 훨씬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국을 바라본다. 그녀는 해리슨과의 관계에서 라즐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두 사람의 재회는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상처받고 변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르제베트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상태로 미국에 도착하는데, 그 몸의 상태가 전쟁이 이 두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에르제베트의 도착 이후 해리슨과의 긴장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격화된다. 그녀는 이 관계의 위험을 직감하고 남편에게 경고하지만, 이미 해리슨의 프로젝트에 깊이 빠진 라즐로는 그 경고를 온전히 듣지 못한다. 에필로그에서 라즐로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작업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 인정이 오는 방식과, 그 인정을 받는 라즐로의 표정이 이 영화의 가장 복잡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승리인지 패배인지를 이 영화는 끝까지 묻는다. 인정받는 것이 구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편입인지를 이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라즐로의 얼굴에 담긴 감정이 이 질문에 대한 영화의 유일한 대답이다.
배우들의 연기 — 브로디, 피어스, 존스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성취다. 그는 라즐로를 통해 예술가의 집념과 생존자의 상처, 그리고 이민자의 존엄이 어떻게 한 인간 안에서 공존하는지를 보여준다. 브로디는 이 역할을 위해 헝가리어를 배우고 체중을 감량하는 등 극단적인 준비를 했으며, 그 준비가 화면 위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감으로 나타난다. 라즐로가 자신의 건축 도면 앞에 서 있을 때의 눈빛, 해리슨에게 자신의 비전을 설명할 때의 열정, 그리고 그 열정이 굴욕으로 바뀌는 순간의 표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이미지들이다. 브로디는 이 역할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그 수상이 과하지 않다는 것을 영화를 본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라즐로가 자신의 건물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강렬한 순간들이다. 창조하는 행위 자체가 이 인물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브로디는 말 없이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들이 대사 없이 찾아온다는 것이 브로디의 연기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준다. 브로디가 마약 금단 증상을 연기하는 장면들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트라우마가 어떻게 중독으로 이어지는지를 이 장면들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가이 피어스가 연기하는 해리슨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캐릭터다. 그는 악인이 아니다. 그는 라즐로의 재능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인정이 소유욕과 통제 욕구와 결합할 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피어스는 해리슨의 매력과 위험성을 동시에 표현하며, 관객이 이 인물을 완전히 비난할 수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복잡한 위치에 놓이게 만든다.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기회를 주는 방식과, 그 기회를 빌미로 라즐로를 통제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해리슨의 후원이 어떤 방향으로 변질되는지가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전환점 중 하나다. 해리슨이 라즐로를 파괴하는 방식이 노골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 캐릭터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그는 항상 라즐로를 위한다고 말한다.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하는 에르제베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강인한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의 예술적 열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열정이 그들을 어떤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냉정하게 인식한다. 에르제베트는 라즐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라즐로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존스의 연기는 이 캐릭터에게 필요한 강도와 취약함을 정확하게 부여한다. 에르제베트가 해리슨과 처음 마주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들이 대사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한다. 대니얼 블룸버그의 음악은 이 영화의 정서적 토대를 구성한다. 건설 소음에서 영감을 받은 선율이 라즐로의 창조 행위와 고통을 동시에 표현하며,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 필요한 정확한 감정적 질감을 부여한다. 이 음악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감정적 무게는 지금보다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음악과 건축이 이 영화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두 가지 모두 구조와 비어있는 공간의 예술이다.
건축과 권력과 미국 — 2026년, 이 영화가 말하는 것
브루탈리스트가 2026년 현재 강하게 읽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들이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 예술가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욕구,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짊어진 상처의 무게가 이 영화의 핵심 주제들이다. 코베트 감독은 이 주제들을 3시간이 넘는 서사 안에서 서두르지 않고 전개한다. 비스타비전 카메라와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의 시각적 언어는 1950년대 미국의 물리적 질감을 그 시대의 필름 기술로 직접 담아내는 방식을 택했다. 이 선택이 이 영화의 시각적 정확성과 역사적 진정성을 만들어낸다. 촬영 감독 리누스 샌드그렌의 작업은 이 영화의 시각적 언어를 완성한다. 빛과 그림자의 사용이 라즐로의 내면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며, 그가 건축하는 공간들이 스크린 위에서 실제로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70mm로 상영된 이 영화를 극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건축 공간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 물리적 규모가 이야기의 무게를 더욱 강화한다.
라즐로의 건축 언어인 브루탈리즘은 이 영화의 핵심 메타포다. 브루탈리즘 건축은 재료의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고, 구조의 본질에 집중하며, 장식을 거부한다. 라즐로는 이 건축 언어로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표현하지만, 그 신념이 권력과 충돌할 때 어떻게 되는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날것 그대로의 재료로 만들어진 건물처럼, 라즐로의 삶도 포장 없이 그 본질이 드러난다. 그 본질은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하다. 영화의 인터미션 구조도 주목할 만하다. 15분의 인터미션은 단순한 상영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적 구조를 두 막으로 나누는 의도적인 선택이다. 1막이 라즐로의 도착과 정착의 이야기라면, 2막은 그 정착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의 이야기다. 이 구조가 영화의 규모와 깊이를 더욱 강조한다.
코베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20세기 미국의 자화상을 그린다. 그것은 기회와 착취, 포용과 배제가 공존하는 나라의 초상이며, 그 초상이 2026년 현재의 미국을 바라보는 방식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브루탈리스트는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말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이민자가 이 나라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라즐로의 이야기를 통해 가장 정직하게 묻는다.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견디고 나면, 이 영화는 가장 오래 기억되는 영화들 중 하나가 된다.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히 좋은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필요한 영화다. 라즐로 토스가 설계한 건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이 영화를 본 뒤 그 건물이 어딘가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영화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브루탈리스트는 현대 영화가 얼마나 야심차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26년 다시 본 이 영화는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생애 최고의 연기와 브레이디 코베트의 가장 완성된 연출이 결합된 서사시다. 라즐로 토스의 이야기는 예술가의 이야기이자 이민자의 이야기이자 생존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건물처럼 단단하게 서 있다. 브루탈리스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끝난 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물이 다르게 보인다면, 그것이 이 영화가 성공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