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봉한 바빌론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192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만들어낸 광란의 서사시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가 이끄는 이 영화는 꿈과 탐욕, 영광과 추락이 폭발적으로 뒤섞이는 시대를 통해 영화라는 예술 형식 자체에 대한 뜨겁고 혼란스러운 사랑 고백을 담아낸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안에 넘쳐흐르는 에너지와 과잉,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는 영화에 대한 진심이 이 작품을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만드는 동시에 논쟁의 대상으로 세운다.

세 인물, 세 개의 운명 — 할리우드가 약속하고 빼앗아 간 것들
바빌론의 세 주인공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할리우드라는 꿈의 기계와 관계를 맺는다. 잭 콘라드는 무성영화 시대의 정점에 선 슈퍼스타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이 인물은 스크린 위에서는 완벽하지만 스크린 밖에서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남자다. 그는 영화 산업의 변화를 감지하지만 그 변화에 적응하는 대신 자신이 속한 시대를 끝까지 살기로 선택한다. 잭의 이야기는 영광의 절정에서 시작해 완만하지 않은 내리막을 탄다. 그 내리막이 비극인 이유는 그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성영화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존재다. 잭은 그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넬리 라로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폭발적인 존재다. 마고 로비가 연기하는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스타가 되기를 원하는 여자이며, 그 원함이 너무도 강렬해서 현실의 장벽을 그냥 무너뜨려 버리는 인물이다. 그녀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녀가 영화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이 단순한 명성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었기에, 그 꿈이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누엘 토레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관찰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디에고 칼바가 연기하는 이 젊은 이민자는 처음에는 변두리에서 할리우드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마누엘이 영화에 대해 갖는 감정은 셔젤 자신의 것에 가장 가깝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사랑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의 감정.
세 인물이 교차하는 방식에서 셔젤의 연출적 재능이 빛난다. 잭에게 할리우드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기에 잃을 것이 있었다. 넬리에게 할리우드는 자신의 전부였기에 잃었을 때 남는 것이 없었다. 마누엘에게 할리우드는 외부에서 들어간 공간이었기에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세 시선의 차이가 바빌론에 깊이를 더한다.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에서 경력 전반을 통틀어 가장 섬세한 연기 중 하나를 선보인다. 마고 로비는 넬리를 통해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와 내면의 공허함을 하나의 인물 안에 동시에 담아내는 연기적 성취를 이룬다. 디에고 칼바는 이 두 베테랑 사이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으며, 마누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이 이 영화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어낸다.
스펙터클과 음악의 과잉 — 절제를 거부하는 연출 철학
바빌론의 가장 큰 시각적 성취는 1920년대 할리우드의 혼돈을 스크린 위에 재현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의 첫 30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경험이다. 언덕 위의 파티 장면은 규모와 에너지의 측면에서 현대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준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수백 명의 엑스트라, 실제로 촬영된 동물들, 마약과 알코올과 섹스가 뒤섞인 광란의 공간. 이 장면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1920년대 할리우드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신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시도다.
라스무스 비데바에크의 촬영은 이 혼돈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 안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무성영화 세트의 복잡한 동시다발적 촬영 장면들, 유성영화 시대 초기의 어색하고 제약이 많은 스튜디오 환경, 그리고 두 시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의 내면이 시각적 언어로 표현된다.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은 이 영화에서 또 다른 주인공이다. 재즈와 오케스트라, 현대적 전자음악이 뒤섞인 그의 사운드트랙은 이 영화의 혼돈스러운 에너지와 완벽하게 맞물린다. 특히 넬리의 첫 무성영화 촬영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영화 촬영의 흥분과 광기를 음악으로 번역한 걸작이다.
바빌론의 형식적 과잉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논쟁 지점이기도 하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극, 절제를 거부하는 연출 방식. 어떤 관객에게는 이것이 영화적 해방이고 어떤 관객에게는 조증적 과잉이다. 바빌론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을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로 다루는 방식은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다. 잭 콘라드가 유성영화 촬영장에서 겪는 굴욕은 단순히 기술적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존재 방식 자체가 시대착오가 되어가는 경험이다. 이 전환기가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역시 늘 무언가의 전환기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잭처럼 거부하는 사람, 넬리처럼 새로운 것을 탐욕스럽게 찾아나서지만 결국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 마누엘처럼 조용히 살아남는 사람. 이 세 유형이 할리우드의 전환기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양면성과 셔젤의 사랑 고백 — 소비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바빌론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영화라는 예술 형식이 갖는 양면성이다. 영화는 사람들을 스타로 만들지만 그 스타를 소비하고 버린다. 영화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기계이지만 그 기계의 톱니바퀴 안에서 사람들이 갈려나간다.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는 예술이지만 그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대와 함께 사라진다. 이 역설이 바빌론이 탐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셔젤은 이 주제를 낭만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잭 콘라드의 추락, 넬리 라로이의 소멸,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 산업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인종과 젠더, 계급의 벽이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도 이 영화는 진지하게 다룬다. 흑인 트럼펫 연주자 시드니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재능이 있어도 색깔이 다르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를 보여주며, 영화가 진보를 주장하면서도 얼마나 쉽게 기존의 차별 구조를 재생산했는지를 드러낸다. 바빌론의 결말은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마누엘이 수십 년 후 영화관에서 사랑했던 영화들의 클립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에 대한 셔젤의 사랑 고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다. 영화가 인간을 어떻게 소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셔젤의 대답이 그 눈물 안에 담겨 있다.
데이미언 셔젤의 작품 세계 안에서 바빌론이 갖는 위치는 특별하다. 위플래시, 라라랜드를 통해 예술적 열망과 그 대가를 탐구해온 그가 바빌론에서는 그 주제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밀어붙인다. 더 크고, 더 시끄럽고, 더 고통스럽다. 바빌론에 대한 비평적 반응이 극단적으로 갈린 것은 이 영화의 성격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영화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 과잉과 에너지를 영화적 자유의 선언으로 읽었다. 이 영화를 거부한 사람들은 그 과잉을 자기 탐닉으로 보았다. 두 읽기 모두 틀리지 않다는 점이 바빌론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바빌론의 가치가 개봉 당시의 흥행이나 비평적 반응으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누엘의 눈물은 영화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끝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 사랑이 이 영화를 만들게 했고, 그 사랑이 이 영화를 보게 한다.
바빌론은 사랑하기 쉬운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도발적이고, 과잉이며, 때로는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도발과 과잉 안에는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살아 숨쉰다. 셔젤은 영화가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를 만들기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역설이 바빌론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이며, 그것이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