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2006)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하고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다.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아드리아나 바라자, 린코 키쿠치가 출연하며, 모로코, 미국, 멕시코, 일본이라는 네 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담는다. 모로코의 총기 사고 하나가 지구 반대편까지 연결된 네 개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이 영화는 세계화의 시대에 인간이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얼마나 연결되지 못하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탐구한다. 바벨이라는 제목이 이 모든 것의 이유를 담는다.

언어가 없을 때 인간이 하는 것들
바벨의 제목은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온다. 신이 인간에게 서로 다른 언어를 주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냐리투는 이 신화적 전제를 현대적 맥락에서 탐구한다. 모로코의 양치기 소년, 미국인 관광객 부부, 미국에 사는 멕시코 보모, 그리고 일본의 청각장애 소녀. 이 네 그룹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해 불가능성이 이 영화의 가장 근본적인 슬픔의 원천이다. 언어가 없을 때 인간이 하는 것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치에코(린코 키쿠치 분)의 이야기에서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녀가 타인과 연결되려는 방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적 순간들을 만든다.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닿지 않는 세계에서 사는 것. 그 고독이 이 영화에서 바벨 주제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다. 린코 키쿠치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감동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치에코를 연기하면서, 그 고독을 몸 전체로 표현한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가, 그리고 그 욕구가 좌절될 때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그녀는 대사 없이 전달한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이 이 연기가 얼마나 완전했는가에 대한 인정이다. 언어의 부재가 이 영화에서 단순히 청각장애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수잔(케이트 블란쳇 분)이 모로코에서 총상을 입고 도움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를 돕는 모로코 사람들과 수잔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다. 그러나 그 장벽이 있어도 돌봄은 전달된다. 언어 없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것들이 이 영화에서 희망의 가장 작은 형태로 존재한다. 언어가 없을 때 인간이 하는 것들의 가장 보편적인 층위는 이 영화에서 눈빛과 손짓과 몸의 언어다. 수잔을 돌보는 모로코 여인의 손길, 치에코가 경찰관에게 다가가는 방식, 아말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 분)가 아이들을 안는 것. 이 비언어적 표현들이 이 영화에서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간 사이의 연결을 만드는 순간들이다. 바벨의 저주가 언어를 빼앗았지만, 몸의 언어는 빼앗지 못했다는 것.
하나의 총성이 만드는 세계
바벨의 서사적 중심은 모로코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다. 양치기 소년이 장난으로 쏜 총이 관광버스의 수잔을 맞힌다. 이 하나의 사건이 네 개의 대륙에 걸친 이야기들을 연결한다. 리처드(브래드 피트 분)와 수잔 부부의 이야기, 그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아말리아의 이야기, 총을 쏜 소년 유세프의 이야기, 그리고 그 총의 원래 소유자였던 야스지로의 딸 치에코의 이야기. 이 연결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선택이다. 하나의 총성이 어떻게 이렇게 넓은 세계를 연결하는가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서사적 질문이다. 총은 일본인 야스지로가 모로코 가이드에게 선물했고, 가이드가 양치기에게 팔았으며, 양치기의 아들이 발사했다. 이 연쇄가 이 영화에서 세계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지구 반대편의 행동이 지구 이쪽 끝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의 연쇄가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든다. 이냐리투의 연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연결된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속도와 색조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모로코의 이야기는 느리고 열기로 가득하다. 멕시코의 이야기는 시끄럽고 축제적이다. 일본의 이야기는 빠르고 화려하며 고독하다. 이 서로 다른 질감이 같은 세계 안에 얼마나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가를 표현한다. 하나의 총성이 이 모든 다른 세계들을 연결하지만, 그 연결이 그 세계들을 하나로 만들지는 않는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리처드의 무력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적 층위 중 하나다. 그는 부유하고, 영어를 사용하며, 미국인이다. 그러나 모로코의 작은 마을에서 아내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의 특권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헬기가 오지 않고, 대사관은 움직이지 않으며,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없다. 하나의 총성이 만드는 세계에서 누구도 완전히 통제권을 갖지 못한다. 하나의 총성이 만드는 세계에서 이 영화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의 분산이다. 누가 이 사고에 책임이 있는가. 총을 쏜 소년인가, 총을 판 양치기인가, 총을 선물한 야스지로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인가. 이 영화는 그 책임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세계화 시대의 도덕적 질문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슬픔
바벨의 가장 깊은 감정적 층위는 연결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의 네 이야기는 하나의 총성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이 인물들 사이의 진짜 연결을 만들지는 않는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의 고독과 씨름하고, 타인과 연결되려 하지만 그 시도가 번번이 실패한다. 이 실패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것들이다. 리처드와 수잔 부부의 관계가 이 영화에서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가장 개인적인 표현이다. 그들은 아이를 잃은 슬픔 이후 관계가 멀어졌고, 모로코 여행이 그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총기 사고가 그 시도를 중단시킨다. 역설적으로 수잔이 총에 맞아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로 연결된다. 극한의 상황이 일상에서 불가능했던 연결을 만드는 것. 이 역설이 이 영화에서 연결에 대한 가장 복잡한 통찰이다. 아말리아의 이야기는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사회적 층위를 담는다. 그녀는 수십 년간 미국에서 살았고, 리처드 부부의 아이들을 돌봤으며, 그 아이들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 사회와 연결되지 못한다. 조카의 결혼식에 아이들을 데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국경에서 추방당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연결의 불평등을 가장 직접적으로 담는다. 어떤 연결은 허락되고 어떤 연결은 허락되지 않는가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 치에코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감정적 절정을 만든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며, 또래들과도 연결되지 못한다. 그녀가 연결을 찾으려는 방식들, 즉 성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끌려는 시도들이 이 영화에서 불편하지만 이해 가능한 것으로 담긴다. 연결에 대한 굶주림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가는가를 이 영화는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슬픔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연결이 이루어지는 순간들에서다. 야스지로가 치에코를 처음으로 끌어안는 장면, 수잔이 리처드의 손을 잡는 장면, 아말리아가 아이들과 사막에서 별을 보는 장면. 이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완전한 순간들이다.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의 세계에서도 연결의 순간들이 가능하다. 그 가능성이 이 영화가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다.
바벨은 크고 야심찬 영화다. 네 개의 대륙, 네 개의 언어, 수십 명의 인물들이 하나의 총성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그 거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 안의 가장 작은 순간들 때문이다. 야스지로가 딸을 처음 껴안는 것, 수잔이 살아있다는 것, 아말리아가 아이들을 잃지 않은 것.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는 연결과 단절의 세계를 가장 정직하게 담는다. 바벨의 저주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저주 안에서도 인간은 연결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