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맹크(2020)는 1930년대와 19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흑백 영화다. 시나리오 작가 허먼 J. 맹키위츠가 오슨 웰스와 함께 영화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쓰는 과정을 담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과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데이비드 핀처의 아버지 잭 핀처가 쓴 각본을 아들이 연출한 매우 사적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권력과 조작의 구조를 드러내는 이 영화는, 예술과 양심과 생존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한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창작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탐구한다.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숨긴 것들
맹크의 시간적 배경인 1930년대 할리우드는 영화 역사에서 황금기로 불린다. MGM,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같은 스튜디오들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대형 작품들을 제작하고, 스타 시스템이 형성되며, 전 세계 관객이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했다. 화려한 파티와 호화로운 파티,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의 사교 모임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맹크는 이 황금기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그 빛나는 표면 아래에 무엇이 있었는가. 맹키위츠(게리 올드만 분)는 이 황금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의 외부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파티에 초대받고, 스튜디오 수장들과 식사를 하며, 재치 있는 말로 모든 자리를 빛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참여하는 이 세계의 기만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 그 기만을 보면서도 그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맹크의 가장 근본적인 비극이다. 알면서도 공모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모의 대가로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숨긴 가장 큰 것은 정치적 조작이다. 영화는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를 중요한 배경으로 다룬다. 작가 업턴 싱클레어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MGM의 수장 루이스 B. 메이어(알레스 볼드윈 분)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권력자들은 싱클레어를 낙선시키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를 직접 이용했다. 가짜 뉴스릴을 제작하고, 배우들을 동원해 선거 선전을 만들며, 영화의 힘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이것이 맹크가 목격한 할리우드의 진짜 얼굴이다. 데이비드 핀처는 이 정치적 조작을 현재적 시각으로 읽히도록 설계한다. 가짜 뉴스릴을 통한 여론 조작, 미디어와 권력의 결탁, 그리고 예술이 선전의 도구가 되는 과정은 1934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핀처는 역사극의 형식을 빌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현재에 대한 이야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황금기는 황금빛으로 빛나지만, 그 빛은 종종 불편한 것들을 가리기 위해 사용된다. 흑백 화면은 이 이중성을 완성하는 형식적 선택이다. 흑백은 시대를 재현하는 동시에 도덕적 복잡성을 표현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황금기의 할리우드는 흑백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선명한 대비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회색 지대로 가득하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선전인가. 무엇이 재능이고 무엇이 착취인가. 누가 창작자이고 누가 소비되는가. 이 질문들이 흑백 화면 위에서 회색의 형태로 떠오른다.
술과 재능과 자기 파괴
맹크의 주인공 허먼 맹키위츠는 천재다. 동시대 모든 사람이 그의 재능을 인정한다. 그는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며, 어떤 자리에서도 가장 재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신의 재능을 의도적으로 소진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자신의 말로 인간관계를 망가뜨린다. 이 자기 파괴의 패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슬픈 부분이다.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이 복잡한 인물을 담아내는 데 탁월하다. 그는 맹크를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로 연기하지 않는다. 맹크의 음주는 무능함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형태다. 그는 이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그 앎이 그를 소진시킨다. 술은 그 앎을 잠시 흐릿하게 만드는 도구이며, 동시에 그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취한 상태에서 맹크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위험하다. 재능과 자기 파괴의 관계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인과 관계로 처리되지 않는다. 맹크가 술을 마시기 때문에 재능을 낭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 재능이 요구하는 것들을 견디기 위해 술이 필요한 것인지. 이 영화는 그 방향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두 가지가 서로 얽혀 맹크라는 인물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능은 그를 이 세계에 붙들어두고, 술은 그 세계를 견딜 수 있게 만들며, 자기 파괴는 그 두 가지 사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맹크가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쓰는 조건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요양하면서, 알코올을 금지당한 채 각본을 완성해야 한다. 이 격리가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 파괴의 도구를 빼앗긴 상태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낸다. 술 없이도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술 없이야 비로소 그 진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이 설정은 암시한다. 자기 파괴가 예술의 필요 조건인가, 아니면 예술을 방해하는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이 맹크를 통해 새롭게 제기된다. 맹크의 경우, 그 답은 양쪽 모두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음주와 자기 파괴는 그에게 이 세계를 보는 특정한 시각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그가 더 많은 것을 창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시민 케인은 그 시각의 집약이며, 동시에 그 자기 파괴가 잠시 멈춘 동안 탄생한 예외적인 성취다.
시민 케인이 태어나는 방식
맹크는 시민 케인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걸작이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탐구이며, 그 탄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논쟁적인 과정을 거치는가를 보여준다. 시민 케인의 각본 크레딧 논쟁은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 중 하나다. 오슨 웰스가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리기를 원했고, 맹키위츠는 자신이 각본의 실질적인 창작자임을 주장했다. 이 영화는 맹키위츠의 관점을 취하면서, 걸작의 탄생 뒤에 있는 권력 관계를 조명한다. 오슨 웰스(톰 버크 분)는 이 영화에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는 천재이고, 맹키위츠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이름과 천재성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능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핀처는 웰스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 영화는 냉정하게 보여준다. 시민 케인이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디어 재벌의 이면을 폭로하듯, 맹크는 할리우드를 통해 창작 산업의 이면을 폭로한다. 케인의 원형이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임은 잘 알려져 있다. 맹크는 허스트의 세계를 직접 경험했으며, 그 경험이 시민 케인의 기반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맹크와 허스트의 관계, 그리고 허스트의 연인 마리온 데이비스(아만다 사이프리드 분)와 맹크의 우정이 각본 창작의 맥락을 이룬다. 마리온 데이비스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그녀는 허스트의 후원을 받은 배우로,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두 번째 아내인 수잔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수잔은 재능 없이 케인의 권력으로 오페라 가수가 된 인물로 그려지는데, 실제 마리온 데이비스는 상당한 재능을 가진 배우였다. 맹크는 자신이 재능 있는 여성을 재능 없는 인물로 왜곡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각본을 완성했다. 이 선택이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윤리적 순간이다. 시민 케인이 태어나는 방식은 순수한 예술적 영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 원한과 정치적 신념, 우정과 배신, 그리고 자신도 완전히 정당화하기 어려운 선택들이 뒤섞인 결과다. 맹크가 완성된 각본을 전달하는 순간, 그것이 걸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걸작이 그의 양심의 일부를 비용으로 지불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예술의 위대함과 그것을 만든 인간의 불완전함이 공존하는 이 진실이, 맹크라는 영화가 시민 케인에 바치는 가장 정직한 헌사다.
맹크는 느리고 촘촘하며 알아야 할 것이 많은 영화다. 1930년대 할리우드와 미국 정치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든 모르든,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질문은 보편적이다. 창작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는 대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위대한 예술은 어떤 인간적 조건에서 태어나는가. 게리 올드만이 살아낸 맹크는 그 질문들의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인간적인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