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노매드랜드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하는 펀은 경제 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뒤 밴 한 대에 삶을 싣고 미국 서부를 떠도는 여성이다. 극적인 사건도, 화려한 반전도 없는 이 영화는 오직 한 인간의 이동과 침묵과 선택만으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노마드로 살아간다는 것이 패배인지, 자유인지, 아니면 그 둘을 넘어선 무언가인지를 이 영화는 끝까지 단정 짓지 않는다.

떠남으로써 남는 것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 분)은 네바다주의 작은 마을 엠파이어에서 살았다. 그 마을은 미국 석고보드 제조업체 USG의 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곳이었는데, 2011년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우편번호까지 폐지된 그 마을에서 펀은 남편도 잃고, 집도 잃고, 공동체도 잃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낡은 밴 한 대와 그 안에 실을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들뿐이었다. 영화는 펀이 왜 떠났는지보다, 그녀가 어떻게 떠나는지에 집중한다. 그녀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애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움직인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계절 노동을 하고, 캠핑장에서 청소를 하며, 사막의 주차 공간에서 밤을 보낸다. 이 이동의 반복 속에서 펀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 아직 그 상실을 언어로 만들지 못한 상태의 침묵이며, 동시에 그 상실을 언어로 만들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 사람의 침묵이기도 하다. 떠난다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펀은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짧지만 진실된 관계를 맺는다. 노마드 공동체의 지도자 격인 밥 웰스(실제 노마드 생활자로 본인 역할로 출연)는 펀에게 이 삶의 방식이 가진 철학을 전달한다. 정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순수한 형태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이해관계나 의무가 아닌, 선택에 의한 만남만이 남는다는 것. 펀이 여동생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은 이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안락한 집, 안정된 생활, 따뜻한 가족이 있는 그곳에서 펀은 머물 수 있다. 여동생은 그녀에게 남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펀은 다시 밴으로 돌아간다. 이 선택은 무책임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의 선택이다. 떠남으로써 그녀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정착함으로써 잃게 될 무언가를 지켜낸다. 영화의 마지막, 펀은 폐허가 된 옛집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방문은 그녀가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기억하면서도 붙들리지 않는다. 떠남은 망각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안고 움직이는 방식이다. 노매드랜드는 이 역설을 통해, 상실 이후의 삶이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를 조용하고 단호하게 제시한다.
상실 이후의 풍경
노매드랜드를 단순한 로드무비로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풍경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감정의 언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미국 서부의 광활한 자연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 공간이 인물의 내면 상태와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황량한 사막, 끝없이 펼쳐진 평원, 붉게 물든 석양은 펀의 고독과 자유를 동시에 표현하는 시각적 언어다. 촬영감독 조슈아 제임스 리처즈의 카메라는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며, 인위적인 조명을 최소화한다. 이 선택은 영화 전체에 다큐멘터리적인 질감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각 장면에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새벽빛이 스미는 사막의 하늘, 차창 너머로 흐르는 붉은 암벽, 강가에서 혼자 수영하는 펀의 모습은 어떤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 풍경은 침묵의 언어다. 상실 이후의 풍경이라는 주제는 단순히 자연 경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노마드들의 이야기가 각각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아들을 잃은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믿었던 삶의 방식을 잃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 안에 모여 있다. 그들은 서로의 상실을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잃음을 안고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이 삶의 방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연기는 이 모든 풍경을 하나로 묶는 중심축이다. 그녀는 펀을 비극적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 동정을 유도하는 연기도, 영웅적 고난을 과시하는 연기도 없다. 그저 한 인간이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한 울림이 있다. 관객은 펀에게 연민을 느끼기 전에 먼저 그녀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녀의 삶을 함께 걷게 된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펀이 동료 노마드의 죽음을 접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이 죽음을 드라마틱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일어난 일로서 제시되고, 펀도 과도한 감정 표현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절제가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을 만든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노매드랜드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그 질문 자체를 관객에게 넘긴다.
미국이라는 광야
노매드랜드는 개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날카로운 사회적 초상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삼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영화의 배경으로 끌어들인다. 노마드로 살아가는 수만 명의 미국인들은 삶의 방식을 선택한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모두 유지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의 노동 장면은 이 사회적 맥락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펀을 비롯한 노마드들은 성수기에 아마존의 임시직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거대 기업의 시스템 안에서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작동하는 이들의 모습은, 미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빈곤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이것을 고발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마존을 악으로 규정하거나, 노마드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대신, 그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오랫동안 신화화해온 가치들 — 자유, 개척, 이동, 자립 — 이 이 영화에서 새로운 맥락으로 재조명된다. 노마드의 삶은 어떤 면에서 미국 건국 신화의 원형인 서부 개척자의 삶과 닮아 있다. 정착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광활한 땅을 가로지르는 삶.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된 삶이기도 하다. 클로이 자오는 이 아이러니를 영화 전체에 걸쳐 조용히 유지한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층위를 제공한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은, 내부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광야로서의 미국, 약속의 땅이자 동시에 사람을 소진시키는 땅으로서의 미국이 이 영화에서 새롭게 그려진다. 노매드랜드는 미국에 대한 찬사도 비판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이 나라에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펀은 다시 도로 위에 오른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열린 결말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집약이다. 답은 없다. 목적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움직임 자체가 삶이며, 그 삶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존엄이다. 미국이라는 광야 위에서, 노매드랜드는 그 존엄의 이야기를 말한다.
노매드랜드는 느리고 조용하며 때로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힘이다. 삶이 무너진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걷기 시작하는가,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하지 않아도 괜찮은가를 이 영화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눈빛과 미국 서부의 풍경으로 묻는다. 쉬운 위로도, 명확한 해답도 없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에도 펀의 밴이 달리는 소리가 오래 귓가에 남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