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은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으로 청룡영화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음악상, 편집상과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곽도원이 종구를, 황정민이 일광을, 쿠니무라 준이 외지인을, 천우희가 무명을, 김환희가 효진을 연기하며 688만 관객을 동원했다. 전라남도 곡성에 낯선 외지인이 나타난 뒤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경찰 종구의 딸 효진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포 영화인지, 미스터리인지, 종교적 우화인지. 나홍진이 설계한 불확실성이 장르를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 불확실성이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오랫동안 그 안에 갇혀있게 만드는 이유다.

마을에 온 것의 정체
곡성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이 무엇인가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질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악마인가, 억울한 이방인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의 무언가인가. 나홍진 감독이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연출적 결정이다.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외지인의 정체를 둘러싼 실마리들이 영화 전체에 흩뿌려져 있다. 그를 악마로 읽을 수 있는 장면들이 있고, 동시에 피해자로 읽을 수 있는 장면들도 있다. 이 양가성이 공포가 발생하는 방식을 다른 공포 영화들과 구분 짓는다. 외지인이 확실히 나쁜 존재라면 이 영화는 훨씬 덜 무서웠을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섭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무당 일광이 가장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그는 퇴마를 수행하지만 그 퇴마가 효진을 살리는 것인지 죽이는 것인지 끝내 명확하지 않다. 황정민은 일광을 과장과 불안 사이에서 담아낸다. 무당이라는 존재가 구원자인지 가해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종교적 긴장의 핵심이다. 외지인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쿠니무라 준이라는 배우의 선택이다. 그는 외지인을 명시적으로 악하게 연기하지 않는다. 낚시를 하고, 밥을 먹으며, 동물의 사체를 다루는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평범하다. 이 평범함이 캐릭터를 더 무섭게 만드는 방식이 가장 영리한 연출적 선택이다.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이 이 연기에 대한 공식적 인정이지만,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배우가 만들어낸 불안감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래 남아있는가이다. 마을에 온 것의 정체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불편하고 가장 강력한 요소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관객이 계속 이 질문을 갖고 다닌다는 것. 재관람 관객이 상당수에 달했다는 것이 불확실성의 힘을 가장 직접적으로 증명한다.
종구가 무너지는 방식
곡성에서 곽도원이 연기하는 종구는 감정적 중심이다. 그는 경찰이지만 무력하다. 딸이 아프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종구는 점점 무너진다. 이 무너짐이 공포의 가장 인간적인 표현이다. 곽도원의 연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종구는 처음에 약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등장한다. 무능하고, 겁이 많으며, 상황에 끌려다닌다. 이 초반의 설정이 나중에 진짜 공포 앞에 섰을 때의 낙차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주치는 방식이 가장 사실적인 공포의 원천이다. 종구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딸 효진(김환희 분)의 변화다. 김환희의 연기가 가장 충격적인 부분 중 하나다. 아역 배우가 이 역할에서 보여주는 것들이 성인 배우들의 연기와 대등하거나 때로는 더 강렬하다. 효진의 변화가 단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종구가 무너지는 속도도 함께 빨라진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다는 공포가 좀비나 악마보다 더 직접적인 공포로 기능한다. 종구가 무너지는 방식에서 가장 잔인하게 설계한 것은 그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무명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일광의 퇴마를 멈추어야 하는가. 종구가 내리는 결정들이 매번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선택 때문인지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종구가 무너지는 방식을 담는 곽도원의 연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순간들이다. 종구는 반복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홍진 감독이 설계한 구조에서 종구의 어리석음이 실제로 어리석음인지,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가 같았을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운명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한 인간이 무너지는 방식을 이 영화가 담는 방식이 단순한 공포 영화의 문법을 훨씬 벗어난다.
나홍진이 만드는 불확실성의 공포
곡성은 나홍진의 세 번째 장편이며 추격자, 황해와는 다른 종류의 영화다. 앞의 두 작품이 장르적 문법 안에서 극도의 완성도를 추구했다면, 곡성은 장르의 경계 자체를 허문다. 공포인지, 미스터리인지, 종교적 알레고리인지 규정되지 않는 정체가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불확실성의 공포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보의 통제다.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항상 불완전하다.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들리는 것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어떤 정보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관객을 종구와 같은 자리에 놓는다. 모르는 상태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그 자리. 종교적 맥락이 불확실성을 더 깊게 만든다. 기독교적 상징, 토속신앙, 무속, 일본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인다. 이 혼종이 어떤 믿음 체계로도 사건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선과 악의 경계가 어디인가, 신과 악마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 질문들이 공포의 철학적 토대를 구성한다. 달파란과 장영규가 만든 음악이 불확실성을 청각적으로 완성한다.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한 이 음악이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긴장을 설계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퇴마 장면에서 울리는 음악과 외지인의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그 청각적 혼동이 시각적 불확실성과 결합하면서 공포를 가장 감각적인 층위에서 완성한다. 나홍진이 만드는 불확실성의 공포가 완성되는 것은 결말이다. 결말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분분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취다.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되지 않는 결말을 가진 영화가 드물다. 그 열린 결말이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랫동안 안에 갇혀있게 만드는 이유이며,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 개봉 8개월 후 글을 쓰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곡성은 답을 주지 않는 영화다. 마을에 온 것의 정체, 종구가 무너지는 방식, 그리고 나홍진이 만드는 불확실성의 공포가 곽도원,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 김환희의 연기로 완성된다. 청룡영화상 감독상이 연출에 대한 가장 공식적인 인정이지만, 진짜 성취는 수상 목록이 아니다. 본 지 오래되었는데도 외지인의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 닭이 세 번 우는 장면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 그 집요한 여운이 곡성의 가장 완성된 공포다.